자유의지에 대한 허망한 심판 – 스탠리큐브릭, 시계태엽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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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에 대한 8년 전의 영화평. 싸이월드 폭파(프리챌은 이미 폭파…)되기 전에 아카이빙하는 차원에서 블로그에 올려둔다.

(영상 링크중에 19금이 좀 나옵니다…미성년자분들은 back!)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네임밸류만 믿고 다운받았는데, 대략 2시간 20분 정도 되는 러닝타임 동안 정신을 놓치고 몰입해서 봤다. 자극적인 신들이 많았기도 했지만, 감독이 던지고자 하는 말들이 꽤나 무거웠던 탓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20여 년동안 상영금지였던 영화니까 어차피 국내 개봉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고, 다운받아 보기도 여의치 않을 것 같으니까, 스토리를 조금은 얘기해도 괜찮을 듯-

충동적인 욕망,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냉소에 사로잡힌 알렉스는 동료들과 강간, 강도, 살인 행각을 벌이다가 결국 동료들의 배반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14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그는, 정부에서 새로 개발한 ‘루드비코 기법’의 테스트에 자원하면 출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무장관이 방문한 틈을 타 장관 앞에서 자원한 알렉스는 루드비코 기법에 따라 범죄, 폭력, 성욕 등이 담긴 장면을 볼 때마다 구토를 하도록 세뇌된다. 파괴적 욕망이 거세된 알렉스는 과거 자신이 피해를 줬던 사람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당하나, 폭력적인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다.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데에 심각한 제약을 갖게 된 그는 결국 자살을 택하나 실패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자살시도 이후에 루드비코 기법의 효력이 소멸되고, 그는 과거의 파괴적인 본능을 다시 회복한다.

Singing in the Rain“과 함께 명랑하게 묘사되는 살인신이나, 정지된 카메라를 통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보여지는 정사신, 괴기한 세트와 복장 등, 이 영화는 만든지 근 30년도 다 되어가는 영화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우 실험적이고 컬트적이다.

특히 BGM 활용이 놀랍다. 앞서 말한 살인 장면 뿐 아니라, 베토벤 ‘합창교향곡 (한 통신사 광고에도 그대로 쓰였다)’이나 ‘메리여왕의 장송곡 (오프닝부터 압도적!)‘, 로시니의 ‘도둑’ 등, 적재적소에 매우 언밸런스한 음악을 깔면서 묘한 대비 효과를 자아낸다. 알렉스가 루드비코 프로그램을 거치는 동안에 프로그램 주창자들의 의도대로 세뇌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또한, 알렉스가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었다.

알렉스의 파괴적 욕망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 ‘루드비코 프로그램’의 진행 방법은 이렇다. 우선 프로그램 시행 대상자의 온 몸을 철저히 묶는다. 그리고 눈을 감을 수 없도록 압박 장치를 단다. 그리고 대상자로 하여금 폭력이나 선정적 장면이 담긴 영화를 계속 시청하게 한다. 처음 얼마동안에는 영화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영화가 계속될수록 피 시행자는 점점 괴로워하기 시작하게 되고,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선정적, 폭력적 장면들에 환멸을 느끼게 되다가 결국에는 구역질까지 하게 된다. 실험자의 이러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는 계속 상영된다. 이렇게 두어 달 동안 같은 작업들이 반복되고, 알렉스와 같은 시행 대상자들은 폭력적인 장면이나 선정적인 장면만 보면 구역질 등의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앞의 ‘합창교향곡’ 링크를 누르시면 해당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거부감 들 수 있음…)

실제 TV나 영화에서는 저런 장면들이 꽤 자주 등장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장면들에 환멸을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혐오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그런 장면들을 즐긴다. 이러한 장면들이 간헐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루드비코 프로그램에서처럼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어떠한 효과가 나타날까? 내 생각대로라면 영화속에 반영된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선택의 여지 없이 ‘강화’가 강요된다는 점에서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연상시킨다. 종 치면 침 흘리는 개나, 폭력을 보고 구토를 하는 알렉스나 매한가지 아닐까.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종 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블로프의 실험과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둘 다 선택의 여지를 제거함으로써 극도의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만 효력이 발휘되도록 스스로를 제한한다는 공통된 한계가 있다. 피실험자가 자신이 내린 선택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기제가 전무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실험대상은 누군가로부터 강요된 선택지에서 이탈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가 자살을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유의지에 의지한 알렉스는 결국 자살 시도를 통해 그 가느다란 끈을 부여 잡고 자신의 ‘악랄했던’ 욕망들을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다시금 끌어 올려내면서 루드비코 프로그램이 강요했던 ‘선택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만약에 루드비코 기법이 스키너에 의해 설계되었더라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스키너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침잠해있는 것 보다는 자유롭게 ‘부유’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유의지를 유인할 수 있는 대상, 즉 ‘강화물‘을 제시한다. 지속적으로 ‘긍정적 강화’를 거치게 되면서 인간의 자아는 자신의 자유의지와 자신에게 강요된 선택지 사이에 타협점을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타의에 오염 혹은 감염된 새로운 자유의지가 만들어진다. 인간의 자아는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게 옳다고. 이 길밖에 없다고. 불행히도 현실은 스키너의 “월든2” 만큼은 못해도, 자유의지가 타협하기에 너무도 쉽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개인들의 자유의지가 끊임없는 ‘오염’과 ‘감염’의 유혹에 투쟁해 온 역사다. 사춘기의 노도(怒渡)도, 결혼적령기의 홍역도, 중년의 윤리적 동맥경화도, 노년의 밑도 끝도 없는 긍정(耳順)도, 내 자유의지와 그것을 물들이려는 세상과의 투쟁 과정에서 쌓여 왔던 짙은 먼지덩어리에 다름 아니다.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내 발 밑에 수많은 먼지들을 쌓아왔다. 한 때는 내 의지의 일부요 욕망의 조각이었던 수많은 먼지들 말이다. 그것들을 쓸어담아 물을 붓고 다시 빚어보려 해도 더 이상 ‘찰기’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깎여나간 부분들이 쓰리고 저린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하다. 달콤한 유인물(긍정적 강화물)들은 끊임없이 나를 깎아내리고, 깎인 부분을 바람결에 불어 날리고 있다. 직장, 조직, 사회, 가정, 그 외의 많은 것들이 내 자유의지를 보다 더 작게 만들 것이다.

이 단단한 시계태엽 속에서 그저 부품처럼 돌아가게 될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의 발 밑을 바라보게 될 당신들에게, 알렉스처럼 창밖으로 뛰어내려보라고 강권하지 못하는 것은, “시계태엽 속 오렌지”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 것이다. 하지만 투쟁해야 한다. 최소한 ‘덜’ 깎이기 위해서라도.

 

2006년 10월 24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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