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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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 반기마다 연례행사처럼 가는 강연자리가 크게 2개인데, 하나는 존경하는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모교 경영대 1학년 친구들 대상 수업(보통 학기 초)이고, 또 하나는 학회 세션 특강(보통 학기 중후반)이다. 전자는 날 너무도 아끼고 보살펴 주신 교수님이 불러주시는 거라 무조건 가는 편이고, 후자는 내 대학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분기점이 되었던 학회의 행사라 별일 없으면 무조건 간다. 공교롭게도 개인 사정 때문에 전자는 화요일, 후자는 수요일에 연달아 다녀오게 됐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두 강의가 몇년째 몇바퀴를 돌다보니 본의 아니게 시간도 없고 해서 강연 내용이 속칭 ‘우라까이’되는 경우가 있는데(물론 variation 30%씩은 양심상 반드시 넣는다), 근데 아무리 강의 내용이 비슷하더라도, 신기하게도 Q&A시간만 되면 매 강의의 특징이 생긴다. 질답이 길어질 수록 그 특징은 더욱 도드라진다.

오늘 학회 강의에선 한시간 반 강의, 한시간 반 질답으로 도합 세시간을 떠들게 되었다 (보통 Q&A 1시간은 간다). 그렇게 한참 웃고 떠들며 먼나라 신기한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한 후배가 굉장히 예리한 질문을 했다. 여러 예의상 수식어를 제거하고 요지만 말하자면 “선배님 이야기는 재미있긴 한데 공감이 안 된다. 우린 당장 취업이 급하다” 였다.

새로운 기술과 다가올 미래, 그리고 그 미래에 기여할 수 있을 자기 자신에 대한 묘한 기대가 에고와 섞여 빛나던 아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걸로 짐작한다. 하나는 선배한테 그런 질문 해도 되나 였을거고, 다른 하나는 깊은 공감을 넘어서는 실존적 불안의 표시였을 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드디어 나올 질문이 나왔구나 싶은 마음에 반갑기까지 했다. 내가 내 강의를 들었다면 반드시 했을 것 같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에 대한 배려와, 실제 궁금함이 섞인 채 에둘러 하는 질문들은 있었다. 기술을 모르는데, 돈도 없는데, 개발자를 모르는데, 배워야 할 스킬셋이 너무 많은데, 창업을 하는 인간형은 정해져있는건데 등등. 하지만 다 변죽이었다. 정곡은 아니었다.

그래, 너희들한테는 바뀌어갈 앞날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당장의 막막한 취업장벽을 넘는게 먼저일텐데, 빅데이터니 딥러닝이니 인공지능이니 핀테크니, 손에 잡힐듯 안 잡히는 가슴 뛰는 꿈나라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괴리감이 드는게 맞지…

정곡을 찔러준 후배에게 일단 감사를 표하고 답변을 시작했다. 내가 학회에 들어갔던 2005년엔 컨설팅 IB 못가고 삼성전자 가면 다들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게 몇년 지나 2011년엔 컨설팅 IB보다 삼성전자 가는게 더 큰 자랑이 됐다, 신의직장이라던 공기업은 서서히 처우가 악화되고 있고, 정권 따라 더 심해 수 있을거다, 어떤 직장에 가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너희가 너희 힘으로 전세금과 반전세 월세 다 해가며 아이 키우고 사람답게 살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아느냐, 왜 그런 좋은 곳 있던 선배들이 여기 저기로 널뛰기하고, 그러다 스타트업으로 흘러들어가는지 아느냐, 토익과 토플 점수 올리고 스펙 채우려는 노력의 귀결이 치킨집으로 가는 “헬조선”적 상황에서, 성공확률이 낮을 지언정 나중에 얻을 수 있는 결과값의 크기라는 면에서 스타트업이라는 옵션, 그리고 그 본령인 “데이터”와 “돈”을 다루는 스킬과 멀어지면 안된다, NPV는 토익 토플 공부보다 그쪽이 훨씬 더 높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현실의 벽은 더욱 엄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 오랫동안 알고 이해해온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난 그 누구보다 그 무게를 잘 아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 후배가 했던 질문이 자꾸 맴돈다. 선배님은 왜 이 길로 가고 계시냐고. 짧게 고민하다가, 5년 전 도훈이형과 나눴던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눴다. 새로운 기술과 방법론을 나쁜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는 ‘넛지(nudge)’를 초기에 세게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되면 최소한 기회까지만이라도 지금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지금의 역량과 그릇으로는 참으로 요원한 길이다. 돌아오는 길이 한결 무거웠다. 후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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