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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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 Hebrew 11:1)

 

성경은 믿음을 “간절히 바라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못 보는 것들에 대한 확신”으로 정의한다. 얼마나 간절한가, 보이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는가, 두 질문 모두 믿음을 가진 자를 꽤 고독하게 하는 질문이다.

믿는 자는 그 믿는 바가 사라지지 않는 한, 더욱 간절하게, 내 눈에 보이는 믿음이 조금씩 더 현실화되도록, 우직하게 달려야 한다. 모든 상황에 준비가 되어있지는 못해도 9할 이상은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치열한 준비와 함께. 그러다 행운의 여신이 눈웃음을 칠 때, 재빨리 기회를 낚아챌 수 있도록.

달리느라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믿음을 향해 달리는 이를 위해 믿음을 보여주는 이들의 고귀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도 믿음이란 간절히 바라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니까. 보여줄 때까지 묵묵하게 응원하고 기대하고 지원하는 이들 덕분에 고독함이 조금이나마 중화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믿음이 또 다른 믿음을 낳고, 믿음의 연쇄가 깊은 허위의 늪을 만들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중심을 잡다가 몇 가지 믿음들이 튕겨나가더라도, 믿음을 주는 이들이 있어 그 연쇄에 쉽사리 빠지지 않으리라는 믿음만큼은 꼭 챙겨본다.

몇 가지 시도들, 그리고 작은 반응들이 믿음을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조금씩 펼쳐 보려 한다. 그 믿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가 될 것을 믿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캡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지었다는
새 궁궐에 대한 삼국사기의 묘사다.
(유홍준 선생의 부연 기고)

아름다운 것은 모름지기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우되 부족하지 않게.
갖추되 넘치지 않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이 여덟자를 서비스 속에 녹여보고 싶다.

단순하되 갖추지 않은 것이 없도록
매혹하되 강권하지 않도록
몰입시키되 속박하지 않도록
강렬하되 어지럽지 않도록
대범하되 극도로 섬세하도록
영악함이 익살을 넘어서지 않도록
의도가 선량하되 무시받지 않도록
욕망하게 하되 천박해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쓰는 자의 명예와 존엄이
진솔함과 검박함 속에서 빛나도록.

그렇게 사랑받으며
오래오래 기억되도록.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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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회사 데이터블의 CI입니다. 새로운 통찰을 발견(discover)하고, 인사이트있게 분석(analyze)해서, 시장과 사회를 변혁(transform)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 회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담아봤습니다.

한동안 잠잠했었지요? 이것저것 정리하고 준비하느라 근황 전하는데 소홀했네요. 앞으로는 좀 더 자주 근황을 나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8월 1일자로 새로운 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사명은 데이터블(Datable)로 정했습니다.  데이터(data)분석을 통해 가능성(able)을 극대화한다는 뜻입니다. 의미는 거창한데 채워나갈 것이 많아 부담이 큽니다.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로 창업했던 회사 트리움이 B2B 기반 데이터 컨설팅이어서 아마도 비슷한 아이템이 아닐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B2C 서비스를 시도해보려고 준비중입니다. 정확히는 B2B2C일 것 같네요. ‘오프라인 활동’과 ‘애드테크(Ad-tech)’를 접목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서비스를 가다듬고 있습니다. 좀 더 서비스 형태가 갖춰지면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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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입니다.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

팀을 꾸리고 회사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자금, 공간, 사업에 대한 조언, 멘탈케어, 하다못해 요새는 만날 때마다 창준생(?)에 대한 격려를 담아 밥과 커피도 무한 공급해주시는 형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인생의 동료들 덕분에 송구하고 또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기대와 격려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그리고 잘 하겠습니다. 손오공의 원기옥이 커지듯, 애정어린 눈으로 데이터블의 성장을 지켜봐 주세요. 우리 스타트업 생태계는 물론 산업과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회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렉시트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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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독립 축하 -_-;;;

 

오늘의 브렉시트 통과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다수결 중심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의사결정 도구인지에 대한 회의가 많이 나올 것 같다. 더군다나 인구구조상 다수인 고령층과 이민자에 의해 대체될 위협에 떠는 저소득층이, 미래세대의 앞날과 중간층 이상 사람들의 미래를 두고 너무도 큰 도박을 걸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의 파멸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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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느낌…?

  2. 10년에 한 번 온다는 국제금융시장의 “블랙스완”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환율은 물론이고 자본시장 전체가 당분간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일본과 EU가 특히 흔들리고 있고, 우리나라가 영국이 EU에 있을 것을 전제로 맺었던 수많은 협약과 자본투자건이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변경해야만 할 위험에 처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통제 관리 개입해야 할 미국이 정권교체기라는 것, 그리고 EU가 오랜 재정위기로 통합에 대한 동력이 많이 약해져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EU의 재정위기 극복에 도움을 줬던 중국에도 만만찮은 뇌관이 숨어있다는 것. 브렉시트가 앞으로 어떤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지 섣불리 예측하긴 어렵지만, 2008년 미국에서의 위기가 PIIGS로 갑자기 튄 것처럼 불의의 피해자들이 속출할까 우려된다.
  3. 영국은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위험과, 향후 몇년 간 진행될 EU국가들과의 지난한 탈퇴 협상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세대가 나뉘었고 지역이 나뉘었다. 약간 뻥 섞어 말하면,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때를 제외한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창시자이자 가장 오래 실험을 지속해온 영국이, 대헌장 이래 8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도전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한다. 극렬한 국론분열과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상을 어떻게 극복할지 매우 걱정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물론 혼란은 새로운 거대담론과 새로운 미래비전의 배양액이기도 하다. 거대한 갈등을 거치긴 해왔지만…
  4. 최근 몇십년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대략 10년 주기로 등장하는 블랙스완이 유발한 자본의 격렬한 이동 과정에서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살 길을 찾기 위한 인재들의 몸부림 과정에서 기술과 산업상의 돌파구가 열리고, 이윽고 새로운 IT플랫폼이 등장해 새로운 10년이 열리는 패턴이 반복되고있다. 공포를 현금과 함께 견디며, 바닥확인 후 자산쇼핑을 면밀히 준비할 필요가 있겠다. 너무 공포스럽게 생각할 것 없다. 자본주의 지속을 위한 “밭갈기” 작업으로 생각하자.
  5. 프리IPO 시장의 위축 가능성이 높고, 벤처 생태계가 기회와 위험에 노출될 것 같다. 하방도 열리고, 상방도 열린 셈이다. 현금을 잘 뽑아낼 아이템이 아니라면, 향후 생존을 위한 대안들을 냉정하게 잘 검토해봐야 할 것 같다. 한편, 대부분의 챔피언 기업들은 이 “밭갈기” 기간 중에 창업되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예컨대 애플이라든지, 마소라든지, 구글이라든지…

걱정말아요 그대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 가슴 깊이 묻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럴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럴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올해를 대표할 노래 딱 한 곡만 고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 노래를 고르겠다.

떠난 이, 떠날 이, 보낸 이, 보낼 이들에게
따뜻한 애정과 위로, 공감을 듬뿍 담아 권한다.

걱정 말아요 그대.

어떤 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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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 반기마다 연례행사처럼 가는 강연자리가 크게 2개인데, 하나는 존경하는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모교 경영대 1학년 친구들 대상 수업(보통 학기 초)이고, 또 하나는 학회 세션 특강(보통 학기 중후반)이다. 전자는 날 너무도 아끼고 보살펴 주신 교수님이 불러주시는 거라 무조건 가는 편이고, 후자는 내 대학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분기점이 되었던 학회의 행사라 별일 없으면 무조건 간다. 공교롭게도 개인 사정 때문에 전자는 화요일, 후자는 수요일에 연달아 다녀오게 됐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두 강의가 몇년째 몇바퀴를 돌다보니 본의 아니게 시간도 없고 해서 강연 내용이 속칭 ‘우라까이’되는 경우가 있는데(물론 variation 30%씩은 양심상 반드시 넣는다), 근데 아무리 강의 내용이 비슷하더라도, 신기하게도 Q&A시간만 되면 매 강의의 특징이 생긴다. 질답이 길어질 수록 그 특징은 더욱 도드라진다.

오늘 학회 강의에선 한시간 반 강의, 한시간 반 질답으로 도합 세시간을 떠들게 되었다 (보통 Q&A 1시간은 간다). 그렇게 한참 웃고 떠들며 먼나라 신기한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한 후배가 굉장히 예리한 질문을 했다. 여러 예의상 수식어를 제거하고 요지만 말하자면 “선배님 이야기는 재미있긴 한데 공감이 안 된다. 우린 당장 취업이 급하다” 였다.

새로운 기술과 다가올 미래, 그리고 그 미래에 기여할 수 있을 자기 자신에 대한 묘한 기대가 에고와 섞여 빛나던 아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걸로 짐작한다. 하나는 선배한테 그런 질문 해도 되나 였을거고, 다른 하나는 깊은 공감을 넘어서는 실존적 불안의 표시였을 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드디어 나올 질문이 나왔구나 싶은 마음에 반갑기까지 했다. 내가 내 강의를 들었다면 반드시 했을 것 같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에 대한 배려와, 실제 궁금함이 섞인 채 에둘러 하는 질문들은 있었다. 기술을 모르는데, 돈도 없는데, 개발자를 모르는데, 배워야 할 스킬셋이 너무 많은데, 창업을 하는 인간형은 정해져있는건데 등등. 하지만 다 변죽이었다. 정곡은 아니었다.

그래, 너희들한테는 바뀌어갈 앞날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당장의 막막한 취업장벽을 넘는게 먼저일텐데, 빅데이터니 딥러닝이니 인공지능이니 핀테크니, 손에 잡힐듯 안 잡히는 가슴 뛰는 꿈나라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괴리감이 드는게 맞지…

정곡을 찔러준 후배에게 일단 감사를 표하고 답변을 시작했다. 내가 학회에 들어갔던 2005년엔 컨설팅 IB 못가고 삼성전자 가면 다들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게 몇년 지나 2011년엔 컨설팅 IB보다 삼성전자 가는게 더 큰 자랑이 됐다, 신의직장이라던 공기업은 서서히 처우가 악화되고 있고, 정권 따라 더 심해 수 있을거다, 어떤 직장에 가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너희가 너희 힘으로 전세금과 반전세 월세 다 해가며 아이 키우고 사람답게 살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아느냐, 왜 그런 좋은 곳 있던 선배들이 여기 저기로 널뛰기하고, 그러다 스타트업으로 흘러들어가는지 아느냐, 토익과 토플 점수 올리고 스펙 채우려는 노력의 귀결이 치킨집으로 가는 “헬조선”적 상황에서, 성공확률이 낮을 지언정 나중에 얻을 수 있는 결과값의 크기라는 면에서 스타트업이라는 옵션, 그리고 그 본령인 “데이터”와 “돈”을 다루는 스킬과 멀어지면 안된다, NPV는 토익 토플 공부보다 그쪽이 훨씬 더 높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현실의 벽은 더욱 엄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 오랫동안 알고 이해해온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난 그 누구보다 그 무게를 잘 아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 후배가 했던 질문이 자꾸 맴돈다. 선배님은 왜 이 길로 가고 계시냐고. 짧게 고민하다가, 5년 전 도훈이형과 나눴던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눴다. 새로운 기술과 방법론을 나쁜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는 ‘넛지(nudge)’를 초기에 세게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되면 최소한 기회까지만이라도 지금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지금의 역량과 그릇으로는 참으로 요원한 길이다. 돌아오는 길이 한결 무거웠다. 후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조선을 극복하라. 창조적으로

서애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강당인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교당. 산세와 강, 나무의 흐름에 맞춰 지어져 있다. 자연을 범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앞뒤옆의 자연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으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편안하고, 무엇보다 시원하다. 수많은 조선 건축물 중 조선적 주체의 이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의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에서 바라본 만대루(晩對樓). 산세와 강, 나무의 흐름에 맞춰 지어져 있다. 자연을 범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앞뒤옆의 자연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으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편안하고, 무엇보다 시원하다. 수많은 조선 건축물 중 조선적 주체의 이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시대로 조선시대를 꼽는다. 영토는 고구려만 못했고, 경제적인 화려함은 고려만 못했으나, 문명의 품격은 세계사를 뒤져봐도 유례가 없을 만큼 고결하고 숭고했던 것이 조선이다.

특히 조선의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s)들이 설계한 조선의 성리학적 “주체”는 600년동안 도덕적, 지적 리더십을 정점으로 한 정치, 경제, 사회 거버넌스의 근간이 되어왔다. 도덕적 솔선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 물질적인 검약과 절제가 최고의 미덕이었다. 사리사욕의 추구는 터부시되었고, 연장자나 지적, 도덕적 권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존중을 통해 혼란 없는 대동사회를 추구했다.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앞에 적혀 있던 어전회의(지금의 국무회의) 관련 소개글이 인상깊었다. 이 안내판에는 조선의 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관제도를 통해 군신의 언행을 모조리 기록해 신중하게 의사결정하게 했고, 면책특권을 가진 삼사 언관들을 통해 어전회의 결정에 대해 견제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당대에 조선을 제외한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국가 운영과정에 이러한 견제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앞에 적혀 있던 어전회의(지금의 국무회의) 관련 소개글이 인상깊었다. 이 안내판에는 조선의 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관제도를 통해 군신의 언행을 모조리 기록해 신중하게 의사결정하게 했고, 면책특권을 가진 삼사 언관들을 통해 어전회의 결정에 대해 견제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당대에 조선을 제외한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국가 운영과정에 이러한 견제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비판과 견제를 놓지는 않았다. 언관제도, 의정부서사제, 경연제도는 현대 민주주의에 비견할 만하다. 실록을 중심으로 한 철저하고 치밀한 기록문화를 통한 견제시스템은 가장 왕권이 강했다는 연산군조차도 몰락시킬만큼 강력했다. 공법(貢法, 세금)제도에 대해 10년간 17만명의 일반 백성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던 문명이 있었던가?

대한민국의 리더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는 각각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전통적 주체를 결합시켰다. 북쪽의 김일성은 공산주의를 접목했을 뿐 근간은 동일하다. 그리고 각각의 체제는 기적적으로 엄청난 포텐을 터뜨리며 각각 세계사 속에서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좋든 나쁘든)

문제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로 바뀌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올바른 판단력과 양식을 갖춘 “시민”적 주체가 조선 이래 내려오고있는 성리학적 주체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적, 도덕적 우위를 가진 선비가 아랫사람들을 “교화”해야 하고, 교화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국가가 제시하는(과거제도와 고시) 전통은 능동적인 서구적 시민 주체와 충돌하면서 권위주의적 인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더 심각한 건 산업화 때에는 그나마 이런 부조리가 생산력에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는데, 창의와 혁신이 강조되는 후기산업화사회엔 잠재성장력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되어버렸다는 것. 상명하복, 경직된 소통, 관료적 마인드는 파괴적 혁신이 일상화된 21세기 경제전쟁에서 패배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다.

돈 한 푼 더 버는게, 혹은 제2의 싸이나 김연아, 갤럭시 시리즈를 만드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600년 된 지적, 도덕적 전통을 토대로 21세기형 주체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새로운 “시민”이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더 멋져보일 수 있는, 그래서 미래세대가 그렇게 자라나고 싶을 수 있게 하는 인센티브 설계가 먼저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용인되어야 한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신감을 토대로 세계를 누빌 수 있는 글로벌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600년 된 주체를 재구축하는 작업이 간단할 리 없다. 적어도 반 백년 이상 걸릴 장구한 문화전쟁이다. 긴 호흡을 가지고 준비하고 연대해 나가야 한다. 혼란스럽지만, 곳곳에서 맹아가 보인다. 희망은 있다. 반만년 된 문명의 저력이 어디 갈 리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