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회피하라! 혁신과 그 적들

'대한민국 금융의 길을 묻다'

장면 하나. 18세기 초 청나라와의 영토 경계 확정을 논의하던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경계를 보다 명확히 측정하기 위해 조정에 천리경(망원경)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릴 수 없는 불명확한 도구를 가지고 영토문제와 같은 중차대한 사안을 다룰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선부는 당시 최신 기기인 육분의와 천리경을 가지고 경계를 정밀히 그려온 청나라 대표의 안을 그대로 조정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장면 둘. 금융위원회의 권고에 의해 국내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이 선제적으로 사기거래를 포착할 수 있는 이상거래감지시스템(FDS)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금융소비자들은 액티브엑스와 공인인증서로 도배된 금융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액티브엑스 기반의 보안시스템은 금융소비자 개인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설치되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금융소비자 개인이 해당 디바이스 보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즉 FDS만 있다면 보안사고의 책임은 금융기관이 지지만, 도배된 액티브엑스가 있다면 보안사고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돌릴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감독기관과 금융기관들은 FDS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경험을 현격히 악화시키는 보안모듈을 고수하려 하고 있다.

책임 소재를 철저히 묻고, 이를 회피하려 하는 문화는 우리 역사속에 꽤 오랫동안 각인되온 정치적, 철학적 전통인 것으로 보인다.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誠意正心) 사물의 이치에 대해 공부해(格物致知) 소양을 갖춘 군자(君子)만이 남을 다스릴 수 있었던(修己治人) 유교적 질서가 국가 정치철학으로 확립된 것은 아무리 늦게 봐도 조선이 건국된 600년 전이다. 유교적 군자를 평가해 국가 운영에 참여시키는 과정이었던 과거시험은 무려 1200년동안 지속된 전통이다. 과거제는 국가고시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지난 60년의 민주공화국 체제까지 연장되어왔다.

이렇게 뽑힌 군자들은 하급관리부터 시작해 일반 백성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 백성은 섬기고 봉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깨우치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규제와 감독은 필수였다. 이를 지키지 않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처벌했다. 감시와 처벌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다양한 단계와 장치가 필요했다. 촘촘한 관료제가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었고, 밑에서부터 꿈틀거리던 혁신적인 시도는 수백년에 걸쳐 철저히 억제되었다.

비슷한 패턴이 우리 제도 곳곳에서 목격된다. 지장이나 도장을 믿지 못해 인감도장을 만들고, 인감도장이 맞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인감증명서를 발급한다.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전자서명으로서의 효력을 주기 위해 만든 공인인증서에도 암호를 넣는다. 최근에는 지문인식 등의 생체인증 기술을 곧바로 전자서명으로 쓰지 않고, 공인인증서의 암호 입력에 활용하려는 등 옥상옥의 프로세스를 만들려 하고 있다. 증명을 위한 단계가 하나씩 더 생길 수록, 그 전 단계에 관계된 사람들은 책임을 면한다. 600년된 책임회피와 혁신저항의 어두운 전통의 그림자가 이토록 깊고 넓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자 혹은 제왕적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 거의 유일한 혁신 방법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의 산업화가 그러했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정보화가 그러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강한 의지로 금융혁신을 밀어부치고 있으나, 남은 임기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임기가 많지 않다는 것은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리더가 불투명하다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공무원들이나 사회 각 주체들은 복지부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지속적인 파괴적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새로 뜨는 기술이 무엇인지, 그런 기술에서의 산업경쟁력에서 얼마나 밀리고 있는지만 열심히 다루는 학계와 언론의 스탠스가 아쉽다. 지금 중요한 것은 책임회피에 골몰하는 전통적 주체, 전통적 국가 거버넌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 모색이다. 혁신의 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주체를 고민하고 실천하지 않은 채, ‘눈치’만 보며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우리 모두가 혁신의 적이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송고한 글 원문입니다. 기고문 링크는 아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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